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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15)- 훈춘사건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9-28 14:56:47 ] 클릭: [ ]

출병구실 만들기 위해 조작한 가짜사건

세인을 놀래운 경신년대참안의 도화선

당시의 훈춘성루

음험한 획책

“일제는 연변반일무장대오가 저들 정규군을 참패시킬 만큼한 력량인줄 몰랐지요. 봉오동전투 후 일제는 깜짝 놀랐지요. 반일무장대오를 얕잡아보고 제멋 대로 봉오동골로 진격했다가 호된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대량의 정규군을 연변에 파견하여 항일무장대오를 소멸할 획책을 꾸미게 됩니다. ‘훈춘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훈춘사건’을 설명하면서 ‘훈춘사건’은 오래전부터 꾸며온 음모였다고 말한다.

‘3.13’운동 후 조선인 거주구역에 건립된 수많은 반일무장단체와 그들이 진행한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5월 상순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 장작림과 일중 공동 ‘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과 간도 일대의 조선인반일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수사반’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류하 등지에서 수백명의 반일무장대원을 체포, 총살하였다. 그러나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강경한 반대로 연변지역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간도 방면의 수사지휘를 맡은 일군 마찌노 중좌는 “중국측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의 정황이 날따라 악화되면 우리측에서 철저한 토벌을 실시한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1920년 7월 16일, 봉천 총령사관 아까쯔까 총령사는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측 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고문 사이또가 동행하며 중국군대가 토벌 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도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토벌’을 2개월로 하고 출동할 병력은 1개 련대로 하며 ‘토벌’ 지역을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길림성 당국은 일본군의 출병은 주권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로 인정하고 단연히 거절하였으며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일본군의 출병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였다. 중국군은 출병하여 토벌을 개시할 적마다 사전에 ‘토벌정보’를 루설하여 조선족 반일부대들로 하여금 미연에 삼림지대로 피신하게 하여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이는 오래전부터 출병을 획책해오던 일제에게 큰 불만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근본적인 토벌을 가하려면 일본군을 주체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직접출병의 계기를 마련하는 음모를 꾸미였다.

일제는 씨비리를 포함한 연변 4개 현과 동녕현 일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 로씨야 3국 접경지대인 훈춘을 출병지점으로 선택한 후 출병구실을 찾으려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급급히 ‘토벌계획서’ 작성에 착수하면서 1920년 8월에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부와 련락하여 파견군의 일부를 토문자(土门子), 초모정자, 삼차구, 위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 주둔군의 작전에 배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륙군성과 참모 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 1920년 8월말에 이르러서는 조선주둔군 사령부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 전부 작성되였다.

병력은 제19사단의 보병 76련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의 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를 경원 부근에 집결시킨 다음 훈춘-초모정자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와 기병 제27련대 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온성일대에 대기하고 있다가 서대파—하마탕—배초구 지방을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의 일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회령 부근에 대기하였다가 룡정촌—국자가 일대를 진공하게 하였으며 보병 제73, 제74 련대, 기병 제27련대의 주력,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서강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황포—투도구 일대를 진공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연변 일대에 대한 대규모의 ‘토벌’을 획책하는 한편 북만주파견군에도 불령선인토벌계획에 따라 보병 2개 중대는 해림, 녕고탑, 이구 방면에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한편 제19사 단장에게는 필요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명령이 없이도 출병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렇게 일제는 모든 만단의 준비를 완료시킨 후 출병하여도 중국정부에서 어쩌지 못하도록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훈춘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음모였다고 까밝혔다.

피로 물든 훈춘성

1920년 9월 12일 아침 5시경,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고요한 훈춘성의 정적을 깨뜨렸다.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지대에 둥지를 틀고 있던 진동, 만순을 두목으로 하는 300—400명의 마적들이 동, 남, 북 3개 방면으로 훈춘현성에 쳐들어왔다. 마적두목 만순은 친일비적 코산의 영향 밑에서 활동하고 있으면서 코산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있는 자이다. 만순은 코산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었다. 코산은 일본군 간첩인 야마모도 기꾸꼬를 애첩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다.

야마모도 기꾸꼬는 일찍 일로전쟁 시 어릴 때부터 일군의 스파이 노릇을 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흑룡강류역의 부라고베시첸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제12사단의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술집에서 접대부로 위장하고 있었다.

이날 동북쪽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경찰서를 진공했고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륙군병영과 헌병병영을 진공, 현공서를 포격했다. 소규모의 마적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민간에 덮쳐들어 살인, 방화, 략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체포한 애국지사들의 눈을 가리우고 감옥으로 실어가는 장면

마적들은 가는 곳마다에 불을 놓아 훈춘시가지는 삽시에 화광이 충천하고 자지러진 총소리로 아비귀환이 되고 말았다. 당시 훈춘시내에는 관병 270여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지라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졸히 응전할 뿐이였다. 길림륙군 공병영 영장 정기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부지로 달려가 일본령사관과 외국인상점을 보호했고 륙군 제2려 제2퇀 제2영 영장 오은성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어 서쪽성문과 북쪽성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세번이나 진격했지만 마적들의 맹렬한 사격을 못이겨 후퇴하고 말았다.

전투가 2시간 남짓 진행된 다음 마침내 마적들은 대오를 거두어가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길장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일본경찰서, 령사관은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랍치된 자는 86명이며 200여간의 가옥이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다.

“일제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훈춘습격이 아니였습니다. 출병구실을 만들자는 것이였지요. 그런데 마적들은 일본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일본놈들은 안달아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제1차 ‘훈춘사건’이 일어난 지 20일 밖에 안되는 10월 2일 새벽 4시경, 만순을 괴수로 하는 마적무리들은 진동패거리와 합세하여 4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훈춘을 대거 진공했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2차 ‘훈춘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가지고 있는 마적들은 동서 두갈래로 나뉘여 성문에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면서 성안을 마구 포격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온 토비들은 시킨듯이 곧바로 일본령사관에 달려들었다. 비록 중국경찰들이 령사관을 호위하고 있었지만 마적들의 기관총과 양총의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담장을 폭파한 마적들은 물밀듯 쓸어들어 령사관에 불을 질렀다.

동대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관병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상부지에 돌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4시간 남짓이 발광하다가 100여명의 사람을 랍치한 후 로흑산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날 마적들은 일본령사관 경찰서장과 조선인순사 1명, 재향군인 1명을 죽인 외에 일본인 남녀 10여명을 살해했다.

‘경신년대학살’의 도화선

“제1차 ‘훈춘사건’이 있은 지 20여일만에 제2차 ‘훈춘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또 제2차 ‘훈춘사건’ 에서 아무런 ‘경제적’ 의의도 없는 일본령사관을 들이쳤다는 것은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음모라는 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심영숙 〈훈춘사건〉)

‘훈춘사건’ 후 만순은 코산에 의해 처단되고 코산도 또한 자기 애첩에게 암해된다.

일제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비적들 속에 쏘련홍군, 중국군대, 불령선인들이 있었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출병구실을 조작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쏘련인들이 무력으로 일본에 대해 위협을 주고 있으며 조선인반일단체에 대한 ‘토벌’을 중국군대에 의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 위험분자들이 ‘훈춘사건’처럼 저들에게 큰 위험을 가져다주는 화근이기에 ‘훈춘사건’은 단순한 마적들의 행위가 아니라 딴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동이기에 군대를 출동시켜야 한다는 구실을 더욱 합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이며 랍치되였다가 풀려나온 일본상인은 “토비들중 조선사람 혹은 불령한당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훈춘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 날 조선 라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명령을 내려 온성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아베대대를 경원군 훈융에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베가 거느린 보병 한개 중대와 기관총 한개 소대가 제일 먼저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려단장 이소바야시가 령솔하는 이소바야시지대, 보병 제76련 대장 가무라가 령솔한 가무라지대, 제37려 단장 아즈마가 령솔하는 아즈마지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 왕청, 룡정으로 진격하였다.

10월 9일, 일본 륙군 대신은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관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훈춘사건’ 은 마침내 ‘경신년대토벌’의 도화선이 되였다.

일본군은 반일단체들의 북만에로의 탈출을 견제하기 위해 할빈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 제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거느리는 야스니시지대를 파견하여 해림을 중심으로 한 중동철도연선에서 북으로 철퇴하는 반일부대들을 막게 하였다. 일본군은 또 씨비리에 출병하였던 제11사단의 보병 한개 대대, 기관총대, 기병 1개 소대, 공병 반개 중대의 병력으로 투문자지대를 구성, 훈춘 동부의 중쏘변계에서 반일무장부대가 쏘련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는 것을 제지할 임무를 맡기고 10월 19일에 국경을 넘어 훈춘 춘화지구의 초모정자, 토문자 등지를 진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제13사단은 하네이리대좌의 지휘 밑에 보병 1개 대대, 기병 1개 련대, 포병 1개 중대로 하네이리지대를 구성한 후 10월 19일과 20일에 국경을 통과한 후 로흑산 부근으로 진격했다. 이 밖에 연해주에서 철퇴하는 제14사단 제28려단 4000여명 이리본군은 쏘련 포세이트에 등륙, 빈해성을 거쳐 훈춘에 침입하여 제15련대를 훈춘과 룡정에 남겨 ‘토벌’대를 강화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자가, 룡정과 조선 회령을 거쳐 라남으로 돌아갔다. 10월 13일, 제19사단 제73련대의 2개 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반일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외를 진감시킨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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