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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연변추억10]오상조선족사범학교에 가보았던 추억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0-10 11:26:22 ] 클릭: [ ]

아키코녀사의 연변추억10

흑룡강성 오상현 거리

연변에서의 첫 1년간의 생활은 아키코녀사에게 전례없던 자극과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연변 외의 다른 곳에 조선족교사를 양성하는 조선족사범학교가 존재한다는 것에 또 다른 놀라움을 느꼈다는 아키코녀사이다.

아키코녀사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86년 3월초, 이제 귀국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온 련락이였다.

연변대학의 정판룡교장이 우리 숙소에 찾아와 남편에게 연변에서의 마지막 기념으로 강연을 부탁한다는 것이였다. 흑룡강성 오상현에 조선족사범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였다. 민족교육의 의의에 대하여 일본의 교육사정과 배합하여…

생각해보면 연변대학-연길에서 사는 1년간 자치주내의 여러가지 행사, 축제 및 타현에 간 일은 있었지만 교육기관에 간 일은 없었다. 지도에서 연변으로부터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흑룡강성 오상현의 조선족사범학교… 남편한테는 생각지도 못한 제의였다. 게다가 전문분야도 아닌 교육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니 망설이는것 같았다. 하지만 고민끝에 길림성 외의 조선족사범학교에 대해 갑자기 흥미가 생긴 남편이였다.

“해보지 뭐!”

그때 마침 북경 중앙민족학원에 류학중이였던 딸애가 연길에 왔다. 우리의 귀국길에 일정을 맞추어 중국의 주요대학들을 함께 돌아 볼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이였다.

나는 딸애를 데리고 가서 동년배의 조선족학생들과 교류를 시킬수 있어서 기뻤다. 연변에 온 이래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지에 갈수 있게 된 나는 좋기만 했다. 남편의 강연은 자료수집을 도울 필요도 없이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였기에 기분이 가벼운 것도 있었다.

아키코(앞줄 가운데)씨가 오상사범학교 녀교원들과 함께

출발하는 당일, 일부러 연길에 마중을 온 오상사범학교의 교장판공실 주임 S씨의 안내를 받으며 연길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오상현까지 가려면 길림역에서 내려 할빈행 기차를 바꿔 타야 했다. 중산복을 단정하게 입은 50대로 보이는 키가 큰 S씨는 지방색채가 짙은 조선어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상현은 농촌지대입니다. 거기서 사는 조선족은 여기저기 농촌에 널려 있어서 대부분 빈곤한 농민들입니다. 조선족자제의 교육을 위해서는 우선 교원을 양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범학교가 세워 졌습니다. 그런데 좀체로 생각대로 안되네요. 선생들도 학생들도 생활하기 위해서는 계절에 따라 밭일도 하고 수확한 야채를 길가의 로점에서 팔기도 해야 해 교단이 비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타현에서 온 학생들도 있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서 하루 세끼 식사비와 수업료를 제공하면서 2년간 공부시키지만 교원으로 남는 학생은 극소수입니다.

가난한 집살림에 한가정에 교사 한명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남은 가족들이 고생하게 됩니다. 공부하는 자식에게 약간의 용돈과 옷들을 부쳐 보내면서 기대를 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졸업 후에 지방의 교원으로 남지 않고 수입이 조금이라도 많은 도시에 진출하여 부모형제들의 은공을 갚으려 하지요.”

오상사범학교 교장판공실 주임 S씨(왼쪽)

길림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창문가로 스쳐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숨결을 느낀 나였지만 그럴 겨를이 없이 남편곁에서 귀를 기울였다. 소수민족교육의 절박성과 어려운 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얼마후 오상역에 도착하였다. 역전앞에 마차 한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마을을 순회하는 뻐스대신이였다. 마차의 짐받이 량켠에 자그마한 널판자로 걸상이 만들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짐짝들을 들고 올라와서 거기에 마주 앉았다.

우리 일행 외에 남녀 3명 정도가 함께 탔는데 그들은 우리의 거동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것들은 무슨 사람들이냐”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역전을 나설 때부터 뒤잔등에 그런 낌새를 느꼈던 나는 “아차!”했다. 털가죽외투때문이였다. 딸애도 짧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솜옷만으로는 추워서 견딜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30분쯤 지나자 차에 탔던 사람들이 저마다 말몰이주인에게 내릴 곳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표식도 없는 길옆에서 내려서는 멀리 보이는 집인듯한 곳을 향하여 씩씩하게 논밭길을 걷기 시작하였다.옆에 앉은 딸애가 내 손을 잡으며 “좋은 풍경이네~”라고 속삭였다.

오상사범학교 지도일군들과 함께

오상사범학교는 연한 벽돌색의 멋진 2층교사였다. 우리는 문앞까지 마중나온 학교관계자들의 따뜻한 미소에 안심되고 긴장이 풀렸다. 2층교실에서 50명정도의 녀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교원의 얼굴로 바뀌여 열심히 조선말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자기 나라, 자민족 언어의 중요성, 문화의 중요성, 력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나는 력사와 문화가 망가져 가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였다.

오상사범학교 학생, 교원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고있는 미찌노(앞줄 가운데)

녀학생들은 유화한 표정으로 남편의 강연을 들으면서 딸애와 나에게 가끔씩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한시간정도의 강연이 끝나자 순식간에 딸애는 녀학생들에게 둘러 싸였다. 딸애는 류창한 중국어로 그들과 손잡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가 어느새 교실을 꽉 채웠다.

남편과 나는 앞으로 이 젊은 세대들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이라고 느끼면서 서로 마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조선통일의 의미로 삼천리(三千里)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다는 아버지의 뜻을 크게 받아들여 미찌노(三千野)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키코녀사의 딸이다. 일찍 중앙민족학원에서 1년간 한어를 배우고 북경대학에서 대학원을 끝마친후 10년간 북경에서 사업했고 요즘에는 일본에서 중국어와 중화문화를 전파하는 유익한 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미찌노씨도 일찍 연길시의 단골손님이였다 한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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