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 날아 내린 그날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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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룡| 작성일 :21-02-23 09:51| 조회 :284| 댓글 :0본문
노트 묶은 3백여통의 편지에는 반백년 전의 사연이 적혀 있다.
[편자의 말: 가장 오래된 스키는 지금부터 4~5000년 전 북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외 옛날 동토지대의 대륙 북방민족들도 스키를 널리 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근대 스키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1949)된 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길림성 통화는 중국 스키의 발원지로서 스키의 ‘요람’이요, ‘스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첫 스키장은 통화에 있었고 공화국이 창립된 후 중국의 첫 스키경기, 중국 최초의 스키운동쎈터, 중국 첫 스키 금메달 선수는 모두 통화에서 나온다.
조선족 스키명장 배인순은 다름 아닌 공화국 제1대 스키 선수이다. 제1대 스키 선수 명단에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다. 배인순을 비롯한 스키 명장들은 중국 스키 력사의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스키는 1920년대부터 동계올림픽의 경기종목으로 되였고 제24회 동계올림픽은 곧 2022년 2월 북경과 장가구에서 공동 개최된다.
일년 앞으로 다가온 북경겨울철올림픽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1950년대 전국 스키대회에서 4련패를 달성한 스키명장 배인순의 이야기가 북경의 작가 김호림에 의해 정리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1960년대 말 배인순, 한경청 부부와 오누이 자식.
【들어가는 이야기】
천리를 넘어 오간 반백년 전의 편지
녀인은 손 편지를 차곡차곡 개여 노트로 한데 묶고 있었다. 노트에 들어있는 이런 편지는 무려 300여 통이나 된다.
녀인은 1961년 섣달 그믐날 북경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녀인은 길림성 휘남현의 출신으로 이름난 스키선수였다. 전국 스키대회에서 4련패를 달성, 메달을 주렁주렁 앞가슴에 달고 있었다. 남편은 길림성 장백현의 출신으로 아직은 북경의 풋내기 과학자였다. 훗날 남편은 단연 중국 통제이론과 응용의 개척자로 등장한다.
그때 처녀와 총각은 각기 다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등산자라면 무슨 길을 타든 마냥 산 정복을 마음에 품는다. 비록 서로 다른 이야기를 엮고 있었지만 만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가 핏줄처럼 통했다. 벌써 몸과 마음으로 동행자로 되어 산정에 오르는 한길을 걷고 있었다.
1963년 4월 27일, 그들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유감스럽게 한 지붕 아래의 한 구들에서 살 수 없었다. 수도 북경으로 호적을 옮기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던 것이다. 녀인은 부득불 천리 밖의 길림성 통화로 돌아갔다.
1957년 제1회 전국스키경기대회 3㎞ 경기 수상자들, 제2위가 배인순이다.
북경과 통화는 직선거리가 약 1100㎞로 기차로만 편도 18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그때만 해도 일개 백성의 신분으로서는 북경이든 통화든 전화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였다.
그야말로 전설에 나오는 ‘견우’와 ‘직녀’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에 드리운‘은하수’는 그들 부부를 기어이 양쪽에 가로막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은하수’는 더 깊어지는 듯 했다. 또 반년 후 남편은 국제열차에 올라 쏘련 류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만나고 싶어도 아예 만날 수 없고 듣고 싶어도 그예 들을 수 없었다.
청실홍실의 편지는 저쪽에 새처럼 날아갔고 이쪽에 소식을 전해왔다.
“1963년 그해 남편은 9개월 동안에 편지를 서른셋 통이나 보내왔어요. 저는 반년 동안에 편지를 스물여섯 통 보냈구요. 편지 왕래가 제일 많았을 때 남편은 편지를 한 달에 아홉 통 보내왔고 저는 편지를 한 달에 여덟 통 보냈습니다.”
반백년 전의 따뜻한 기억이다. 녀인은 백발이 내린 얼굴에 다시 홍조를 떠올리고 있었다.
갈림목이 나서는 오솔길처럼 인생의 여로는 이리저리 굽히고 복잡했다. 남편의 쏘련 류학생활은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3월 많은 중국 류학생이 모스크바에서 반미시위에 참석하는데, 쏘련 군경의 폭행으로 미구에 9명이 중상을 입는다. 남편은 이 중상자들의 한 사람이였다. 남편은 이듬해 말 또 쏘련당국에 의해 강제 귀국을 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이번에는 국내에서 뜻하지 않았던 감투를 쓰고 거의 2년 동안 격리심사를 받는다.
이번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편지로 나누기 힘들었다. 편지마다 구절구절 심사를 받아야 했다. 졸지에 보름을 지나 한두 달이나 소식이 두절되였다. 꿀 같은 사랑이었지만 쓰디 쓴 맛을 보아야 했다.
강남스키장 옛터에 1950년대 말의 통화 스키 훈련캠프가 있었다.
1973년 9월, 녀인은 공화국 총리에게 언감 생감 상고(上告) 편지를 올렸다. 편지는 장장 10년이나 ‘은하수’에 의해 갈라져 있는 ‘견우’와 ‘직녀’를 한데 살게 해달라는 애절한 소원을 담았다. 천리를 지척으로 넘나든 이 조선족 부부의 사랑에 하늘도 무척 감동되였을까… 얼마 후 빨간 도장이 박힌 전근 통지문이 북경에서 곧바로 통화에 날아왔다.
그때 그 시기 전국적으로 인적 전근은 전부 동결되고 있었다. 상고 편지 사건은 메가톤급 폭탄처럼 중국과학원을 뒤흔들었다. 이 사건은 과학원 전체 3만 명의 직원에게 그해를 장식한 최대의 화제로 되였다. 정말이지 전설 같은 이야기이요, 소설 같은 이야기이였다.
얼마 전 녀인은 옛 편지들을 거의 50년 만에 기자에게 모두 공개했다. 많은 것은 내밀한 가족 이야기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세상에 그예 묻혀버릴 수만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 시절 주변에 일어났던 이야기에 편지들을 올려놓았다. 력사의 저쪽으로 멀어진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을 다시 눈앞에 새록새록 떠올릴 수 있었다.
싯누런 편지지에는 반백년 세월 속에 묻혔던 오랜 향기가 피어오른다.
“이 편지는 결국 우리의 것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지만요, 또 우리 조선족 력사의 일부가 아니겠어요.”*
(다음기 계속)
글/사진 북경 김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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